네덜란드의 예술 분야 중 건축, 미술, 공예 부문으로 나누어 알아보기로 하자.
네덜란드의 건축
네덜란드의 건축은 십칠세기에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석재와 벽돌을 사용하여 간결하면서도 회화적 효과가 잘 표현된 작품이 풍부하다. 대표적인 건축가로는 헨드릭 드 카이저와 리벤 드 카이가 있다. 카이는 하를렘의 정육점을 위해서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높은 경사의 지붕을 가진 직사각형의 건물을 설계했는데, 벽면에 벽돌과 석재를 멋지게 이용하여 바로크의 회화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또 한편 카이저는 암스테르담에 종교개혁 이후 최초의 교회인 남교회와 서교회를 바실리카 형식으로 건축했다. 특히나 서교회의 내부공간은 십칠세기 후의 건축에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본당을 없애버리고 설교단을 설치한 직사각형 모양의 형식으로 설계하였다. 캄펜은 카이저보다 약 일세대 이후의 건축가로서 팔라디오풍의 고전주의를 네덜란드에 도입했다. 제자인 포스트와 함께 건축한 헤이그에 소재한 마우리트호이스는 벽면이 이오니아식 대접받침을 가진 편개주에 의하여 다섯개의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튀어나온 중앙부분의 세 개의 벽면을 사암, 그의 바깥부분의 양변을 벽돌로 만들어 변화를 주었다. 캄펜은 암스테르담에 시청을 건설했다. 암스테르담 시청의 정면은 가운데 부분이 돌출되었고, 좌우 양쪽 부분도 살짝 돌출되었다. 그러한 볼록하고 오목한 부분이 심한 면을 코니스 상층과 하층으로 나누고, 각 층을 편개주의 라인이 감싸고 있다. 건물의 가운데 부분에는 광대한 시계탑이 있고, 다른 각각의 부분에는 플로리스 양식을 표현한 장식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안트워프의 건축가인 코르넬리스플로리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내부에는 두 개의 내부 정원과 대중을 위한 커다란 공간이 있는데, 이 당시의 암스테르담 시민의 권위와 긍지를 나타내었다. 캄펜 이후에는 피터 포스트가 출현하여 마우리트호이스를 완성시켰다. 헤이그 근처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호이스텐 보스를 건축했다. 이외에도 필립 빙그본즈는 트리펜호이스를 암스테르담에 건설했다. 독일, 영국, 프랑스에 영향을 준 네덜란드의 건축은 십팔세기로 들어서며 점차 네덜란드의 개성있는 양식이 희미해졌다.
네덜란드의 미술
네덜란드에서 발전된 시각예술을 네덜란드의 미술이라 칭한다. 이스라엘스는 파리에서 미술을 배웠고 네덜란드에서는 십구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다. 활동 초반에는 역사화에 집중을 했다. 네덜란드로 돌아온 후 어부에서 영감을 받아 가난한 생활 속에서 영화같은 인생의 진솔한 의미가 있음을 알고, 이후의 작품은 이야기 하듯 진실된 묘사를 하며 어부와 일상생활을 그렸다. 이와는 반대로 풍경화를 주로 그려낸 용킨트는 인상파를 능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용킨트는 헤이그에서 미술을 배운 후 파리로 이동했고, 가끔 고향인 네덜란드를 방문하는것 외에는 프랑스에서 인생을 보냈다. 속세의 관습을 무시하고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용킨트의 일상은 술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유화 부문에서 인정을 받은것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것도 있었다. 하지만 수채화와 데생 부문에서는 높이 평가받았다. 용킨트는 타고난 감각으로 공기의 아름다움이나 물빛 등 찰나의 순간에 변화하는 자연을 이해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했다. 용킨트는 공기의 아름다움움을 작품에 표현하면서 인상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네덜란드는 십칠세기가 되어 하를럼, 암스테르담, 레이던 등의 세계적인 무역도시가 되며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무역이나 상업으로 많은 재산을 얻은 사람들이 왕후나 교회를 대신하여 역사화나 종교화 대신 풍경화, 초상화 등을 화가에게 요청했다. 렘브란트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가 그린 종교화도 종교시설을 꾸미는 것이 아닌 일반 시민의 집을 장식하는 작품으로 그려졌다. 풍경 뿐 아니라 동물도 자주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동물화를 그린 퀴프, 강과 바다를 주로 그린 호이옌, 교외의 풍경을 주로 그린 홉베마, 홉베마의 스승인 라위스달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네덜란드의 공예
네덜란드의 공예는 십칠세기부터 십팔세기에 지방의 성격이 반영된 자기 제조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십육세기부터 마졸리카 도기의 제조방법이 내려오고 있었다. 십칠세기로 접어들면서 네덜란드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나 풍속이 중심이 되며 중국의 영향을 받아 델프트 도기가 발달하였다. 흰 바탕에 청색으로 무늬를 그린 델프트 도기는 접시, 식기류, 항아리 등을 만들었고 이는 유럽 북부 지역에 공급되었다. 십팔세기 중반부터 독일의 마이센이나 작센에서 단단한 성질의 도자기가 제조되기 시작하면서 델프트 도기의 제조방법은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으나 천육백팔십년대부터는 델프트 도기의 제조법 사용이 다시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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