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예술 중 미술부분은 중국 또는 중국인에서 기원하였거나 그에 의해서 실행된 시각적인 예술이다. 타이완이나 화교가 중국 문화에 근거하 시행한 미술도 중국 미술로 구분할 수 있다. 중국의 예술은 석기시대부터 시작되는데, 그 연도가 기원전 일만년까지 추측된다. 이 시대의 예술은 거의 단순한 조각이나 도자기의 형태이다. 이후에는 왕조에 따라 시기가 지나면서 그 미술적 모습이 달라지는것을 볼 수 있다. 중국은 그 문화가 지워지지 않고 매우 오랜시간동안 연속되어 보존되어온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서양의 문화권에서는 르네상스시기부터 장식 예술로 구별되어 온 것들이 중국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여겨져 왔으며, 도자기의 경우에는 여러명의 장인이 모여서 다량으로 생산 및 보급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직물, 도자기 등의 공예품들은 황궁에 놓여 그 황실의 권위를 보여주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반면에 수묵화는 주로 문벌귀족에 의해 그려졌다. 주로 새, 풍경, 꽃 등의 사물이 묘사되었다. 문벌귀족은 사물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들이 받은 영에 근거하여 묘사하였다. 이런 동양 고유의 예술미는 이후 서양에 수입되어 인상주의라는 사상을 남겼다. 중국 회화는 중국이 다른 나라의 영향을 상당히 적게 입었다는 것과, 외국문화에 대해 늘 자주성을 잃지 않고 변하였기 때문에 그 고유한 특징을 지킬 수 있었다. 중국 회화는 지속적, 보수적이었다.
명나라의 회화
명나라 시기의 회화는 유파적 또는 시기적으로 세가지의 시기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첫번째인 1기는 명나라 초에서 영락제까지로, 원나라 말기의 문벌귀족 중 예찬과 왕몽은 홍무 시대까지 살아남았었고, 이를 형식상 모방한 후자, 왕불을 스승으로 삼아서 제자인 서분, 조원 등이 활동했다. 두번째인 2기는 선덕제에서 홍치제까지이며, 화원의 양과 질이 모두 충실해졌고, 남송원체의 화조도를 되살린 변문진 일가나 대진을 우선으로 한 석예와 이재의 산수 등 절파라고 불려진 화가가 사으로 분방한 필묵을 표현하였다. 이 시기의 마지막에는, 어느 유파에도 따르지 않았던 독특한 화가들인 장령·당인·주신·구영 등이 있었으며, 남송원체화를 계승하였다는 의미하는 원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마지막 세번째인 3기는 가정제·정덕제에서 명나라 말기 까지로서, 성화제 때부터 활동하였던 심주 문하의 문징명을 우두머리로 오파의 문인 화가가 이 시기에 환영을 받았던 오위·주단·장로 등 절파의 화가에 대신하여 화단의 주도권을 지배하고, 숭정제·만력제 때의 동기창의 이론적인 지지를 받아서 유파로서는 세분화되면서 이후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화의 주류를 구한다. 오파 문인화 이외에 만력에서 명나라 말기까지는 다양한 특유의 작가가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정운붕·이사달·항성모·오빈 등이 이에 속하는데 최자충·진홍수 등은 당나라 시대까지 의고적 작품을 남겼다. 절파는 사시신을 거치어 남영 가문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고 하는데, 남영은 도리어 남북의 화풍을 타협한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육조시대의 회화
육조시대의 회화의 특색은 후한 말에 등장한 문인화가에 이어 많은 훌륭한 화가를 낳은 점이다. 또 왕미와 송병의 그림에 관한 이론에서 볼 수 있는 노장사상으로 증명된 뛰어난 예술비평이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회화의 주제가 되는 소재로는 과거의 설화화나 권계화 이외에 새롭게 불교회화가 개발되기도 하였다. 현대 회화의 역사에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화가 중에서는 '고개지'가 가장 유명하며, 대영박물관의 소장품인 '여사잠도권'의 원본은 고개지의 작품이라 전해진다. 인물화나 산수화로서 필법과 구도 모두 먼 옛날의 서정적인 표현으로부터 상당한 진전이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한나라의 회화
한나라 시대에는 예의에 관한 가르침을 규범으로 삼는 태도를 나라의 정책으로 여겼다. 이로 인하여 권선징악을 목적으로 유교의 실천 덕목들을 나타낸 그림 및 풍습으로 섬기는 모든 신과 자연을 그린 산수화 등이 궁이나 무덤의 벽화로 그려졌으며, 기와 및 돌 새겨졌다. 하지만 비열한 표현을 벗어나지 못한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생기가 넘는 아름다운 작품이 있었으며, 선으로만 그린 그림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회화의 기본형식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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