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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예술 - 시대별 미술에 대하여

by 엘리1023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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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회화 그림 쿠스투나

 

지리적으로 프랑스로 알려진 지역에서 유래한 프랑스 미술은 여러가지의 조형예술과 시각예술로 구성되어 있다. 조형예술인 조각에 관련해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의 특징에 대해 서술해 보려고 한다. 시각예술인 회화작품과 관련해서는 인상주의, 자연주의 및 17세기부터 18세기에 나타난 특징을 알아보도록 하자.

조각

17세기 후반 ~ 18세기

십육세기 조각의 고전주의적 전통을 반영하여 프랑수아 지라르동은 결국 십칠세기 말 베르사유의 정원에서 르브레른의 감독 아래 우아한 양식을 표현하고 발전시켰다. 이미 고대 로마를 말하기보다는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려는 계획이 있었던 것같다. 앙투안 코와즈보는 베르니니의 영향으로 더욱 역동적인 양식을 보여주었지만 고전주의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남부 프랑스와 제노바에서 활동했던 피에르 보즈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크로토나의 밀로'에서 바로크적인 강렬한 감정을 표현했다. 십팔세기 프랑스 조각은 이전의 시대이후부터 바로크 양식이 강했다. 전반부에는 쿠스투나 르모완 등이, 후반부에는 장 밥티스트 피가르가 바로크의 역동적인 부분과 고전주의의 정적인 부분을 결합해 '아처 백작의 묘비'를 조각했다. 러시아로 건너간 파르코네는 작은 조각에 능숙하였고, 장 앙투안 우돈은 고상한 태도로 퐁텐 블로파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적인 초상화에도 눈부신 작품을 그렸다.

시대별 회화

17세기 ~ 18세기

십칠세기 초, 후기 마니교의 두 번째 퐁텐블로파가 활동했다. 이 물결은 프랑스 고전적 경향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지나칠 수 없다. 천칠백이십칠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시몬 베가 새로운 그림을 전수했다. 그는 루이 십삼세의 궁에 소속된 화가로서 십칠세기 전반을 이끌었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의 화풍은 명암과는 대조적으로 카라바조와 같았으나 프랑스로 돌아온 에는 상징성은 부족하지만 상당히 부드러운 바로크 양식의 장식을 밝고 다채롭게 그렸다. 그의 제자였던 미나르, 르브르엉, 르사에르는 매우 훌륭한 화가였다. 샤를 르브론은 로마에서 유학하여 볼로냐, 라파엘로와 고대 미술 등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천육백사십육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루이 십사세의 보호를 받는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중심 작가로 활동했다. 예술가로서도 그 모양과 구성의 섬세함을 인정받았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 건축을 총괄하는 감독으로서 고블리니치와 가구, 조각 등을 지도했을 뿐 아니라 직접 장식적인 그림을 그렸다. 왕립아카데미는 고대 조각, 르네상스의 거장 푸생, 볼로냐 등의 미술을 교과서로 가르쳤다. 인물의 심리적 몸짓과 표정을 배웠지만 감정의 자유보다는 이 교과서들을 따르도록 강조했다. 아카데미는 색채보다 엄격한 드로잉을 강조하고 유행을 억제하며 질서나 권위를 나타내는 피라미드형 구조물, 좌우 대칭의 역사적·종교적 그림을 그리게 했으며 우수한 젊은이들이 로마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기본적인 교육 형태는 로랑 드 라이르나 브르동처럼 자유로운 성향의 예술가들을 압박했고, 또 미래 세대의 수많은 독창적인 화가들과 맞서기도 했다. 플랑드르에서 갓 들어온 바랑센에서 태어난 바토는 젊은 나이에 파리로 건너가 이탈리아 희극과 귀족적 쾌락을 결합해 풍부한 빛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상류층 남녀가 숲과 정원에서 잔치를 즐기는 풍속화로 볼 수 있는 페테스 갈란테스라는 주제이지만 귀족들의 덧없는 꿈을 우아하고 유혹적으로 표현한 이미지다. 대표작이 '시테라 섬으로의 출발'인데, 그의 후기 작품인 '거성의 성호'와 '지르'에서는 빛의 투과에 둘러싸인 형상이 순수한 시각의 세계로 다가가고 있다. 루이십오세의 전반적인 통치에 의해 가장 환영받은 것은 이 그림이었고, 이 그림은 랭커와 파테르에 의해 계승되었다. 프랑수아 부셰는 매력적이고 우아한 로코코 장식가로서 가장 철저한 화가였다. 밋밋한 색감과 경쾌한 화풍이 로코코 스타일의 인테리어와 잘 어울린다. 십팔세기 후반,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는 부쉬 양식을 계승했지만 농촌 회화, 민화, 역사화, 신화화 등에서도 능력을 발휘했으며 상상력과 강렬한 붓놀림의 감수성을 지녔다. 그는 낭만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인상주의와 자연주의

천팔백칠십사년 사월에 인상파는 파리에서 나다르 사진 갤러리와 함께 첫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는 모네, 피사로, 세잔, 시슬레, 르누아르, 드가 등이 모인  조각가, 판화들의 익명의 협회 전시회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샤리바리 비평가들의 모임으로 널리 알려진 모네의 인상, 일출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인상주의는 천팔백팔십육년에 팔차까지 지속되었다. 십구세기 말 살롱 화가들조차 앵그르 시대의 깔끔함과 권위에 결핍되어 있었고, 판에 박힌 견해서 냉담하고 깨끗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이었다. 인상주의는 변화가 없는 상황을 개방하여 새로움을 주입했다. 그림은 이를 계기로 근대로 빠르게 향했다. 다윗의 고전주의를 시작으로 역사, 문학 등 많은 주제가 그려졌지만 모두가 느끼는 것은 확실히 자연으로의 회귀나 찬양이 적다는 것이었다. 자연은 예술의 스승이기도 하면서 근원이다. 십구세기 초반에는 낭만적이지 않고 장식적인 재미를 위해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자연의 감동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풍경화가들은 그 시대 전시회의 인기로 늘 주목받았지만, 그들의 관찰과 감정에서 몸과 마음이 자연에 융합된 화단 안의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라 화단 밖에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십칠세기에 산수가 대가였다고 한다. 하지만 산수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배경에 지나지 않으며, 십구세기 산수화가들은 자연을 신선한 인상에서 보고 새로운 방향으로의 발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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